2025 쌀편지
올해는 10월 22일 첫 도정을 다녀왔습니다. 추수철, 정미소를 어설픈 시간에 가면 2~4시간씩 기다려야 해서 도정을 하러 학생 몇몇과 새벽에 출발합니다.
도정을 마치고 쌀을 싣고 정미소를 나서면 아침 7시 30분 정도가 되지요. 아침 해가 뜨는 시간입니다.
트럭 가득 실은 햅쌀, 흐뭇한 마음식구들과 함께 쌀을 길러온 우여곡절이 스치고 떠오르는 태양, 깨어나는 산과 들, 아스라한 물안개.. 여러 심상과 풍경이 어우러져 어느순간 코끝이 찡해 집니다.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찬 것같이 충만 합니다.
10월 13일, 추수를 마친 다음날
학생들과 쌀 추수의 변천사를 나누었어요. 1945년 해방 직후에 모든 과정을 사람 손으로 하는 추수 풍경부터 2021년 작은학교에서 했던 30kg 자루로 받아내는 구식 콤바인과 함께하는 추수 풍경까지.
학생들이 논에서 300개의 쌀자루를 나르던 것도 벌써 4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콤바인에서 곧바로 트럭에 실린 톤백으로 쌀을 받아내니 비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해 졌습니다.
추수에 참여하는 과정이 많이 생략된 셈이지요.
예전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놀랍기도 하지만, 벌써 이 편안한 추수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서도 저의 마음 한켠엔 왠지 모를 헛헛함과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단연 AI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며 농사에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 자동화되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겠지요.
돌이켜보면, 농사에서 느낀 감동의 순간이 저의 삶을 이끌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못자리에 모들이 함께 발아하여 첫 앞을 내는 순간,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모내기를 마친 논을 보며, 8월 초 벼들이 일제히 이삭을 피워올릴 때, 오늘과 같이 첫 도정을 하고나서….
그런데 내가 감동하고 전율을 느끼는 농사의 과정을 무언가가 대체한다면, 나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계속해서 농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편안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더 하면서 살아간다면 더 대단한 어떤 순간들을 경험하게 될까? 여러 질문이 듭니다.
그러나 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학교 농사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편리한 기술들을 사용하며 변화하고 있지요.
제가 작은학교에서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에 비하면 경험과 기술도 쌓이고 훨씬 수월해 졌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고생이 덜하다고 해서 감동의 크기가 작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편리함에 너무 빨리 그리고 당연히 익숙해지는 사람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은, 감동의 순간들에 무뎌지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당연하지 않게 섬세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싶어요. 이 순간들이 삶을 이끌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끌리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밥 한 술에도 감사하고 감동할 줄 알게 된다면, 다가올 AI 시대도 그리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요 · 이 쌀을 나눌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2025. 10. 22
살래골 작은학교에서
하숑 올림.


